요한복음 11:17~37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롯해 마르다와 마리아,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비방하면서 왜 장님을 고칠수 있는 능력을 가진 당신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나사로를 미리 죽지않게 고쳐주시지 않으시고 죽도록 내버려 두었는지를 물었다.
삶과 죽음이란 것은 인간의 삶 속에 어쩌면 유일하게 존재할지도 모르는 흑백논리이다.
모든 병의 치료는 죽음 이전에 의미가 있고, 죽음의 상태에 이르기 이전에 예방하는 행위이다. 공식적으로는 '가사상태' 에서 깨어나는 경우를 제외하고 현대과학은 죽음 이 후에 다시 살게하는 방법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설교 본문에서의 등장인물들은 예수님께 왜 죽음의 상태에 이르기 이전에 나사로를 낫게하지 않았냐고 묻는것 이다. 이미 죽었기 때문에, 다시 소생할 수 있는 기회는 사라진 것이라고 모두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그 말씀을 하시며, "나는 부활이며, 생명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어떤 논리적 흐름을 가지고 이 이야기로 이어졌는지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지만, 설교 예화 말씀이 기억에 무척이나 남는다.
어떤 사람이 강제수용소에 포로로 징집되어 오랜 시간을 보낸 뒤에 생활고 등의 문제로 거처를 마련하지 못하고 38년간 떠돌이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것을 안타깝게 여긴 주변의 사람들이 그 사람에게 집을 마련해 주었다.
그 집을 보고 한 사람이 '이런 집을 마련해 주시다니 하나님은 정말 살아계시고 은혜가 많으신 분이시네요' 라고 이야기를 하자 오랜 떠돌이 생활 뒤에 집을 선물로 받은 그 사람은 아니라고 이야기 하면서,
"제가 강제수용소에 징집이 되었던 순간이나, 떠돌이 생활을 해야만했던 지난 40여년의 시간 동안 하나님은 충분히 살아계시고 은혜가 많으신 하나님이셨습니다"
라고 이야기 했다고 한다.
이런 것이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의 믿음과 확신 아닐까 생각을 했다.
나의 현실에 무언가 필요한 것이 있을 때만 하나님을 찾고, 은혜를 구하는 내 모습이 부끄럽고 반성이 되는 부분이다.
하나님은 나의 현실적인 필요와 무관하시게 이미 찬양받으시기 마땅하신 좋으신 분인데, 나는 내 필요, 상황, 현실만 생각하면서 그 분을 찬양하고 감사하고 기뻐하지 않았던 것 같다.
나의 이기적인 필요를 앞세워서 이거 해 주시면 참 좋으신 하나님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것도 채워주시면 은혜가 많으신 하나님 이라고 하고.. 그걸 위해서 기도하고.. 그랬던 것 같다.
나는 인격과 신앙이 얼마나 부족하고 모자란 사람 일까.
얼마나 더 예수님을 닮아야만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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